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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강제징용 사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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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조선인들을 강제로 납치해서 일본에 끌고가 일을 시켰다길래 실체를 알고 싶어 옛날 뉴스검색을 해봄. 일제시대 조선인들의 국적은 일본이었지만 내지(일본 본토)로 가기위해선 도항증이 필요했음. 도나 시의 경찰서에서 발급해주었는데 여행목적으론 발급이 안되고 유학이나 공무나 일본현지의 초청이 있는경우만 발급이 가능해서  일반 서민은 발급이 쉽지 않았다고 함. 참고로 일본 패전 5개월전인 1945년 3월에서야 도항제도가 폐지되고 조선인의 무제한 일본방문이 가능해짐. 옛날신문을 보니 도항증 딸 능력이 안되니 돈주고 가짜 도항증을 사거나. 뇌물, 밀항등이 성행한걸로 보임 당시 조선인들은 밀항비를 마련하기 위해 초가삼간과 유일한 재산인 소까지 팜. 1940년 부산에서 거동수상자 한명을 경찰이 수색했는데 위조 도항이 발견되어 체포됌. 이 청년은 경북 성주출신으로 위조 도항증으로 일본에 가기 위해 부산시내를 떠돌다 검문을 당한걸로 보임.   밀항브로커들이 전남지방 시골을 돌아다니며 농촌의 우민들을 꼬셔 밀항비를 받고 밀항시키려다 부산 영도 청학동 해안에서 백명의 밀항자들이 체포당함. 인천에 사는 이경태라는 남자가 일본으로 노동일 하러 가고 싶으나 도항증이 마음대로 발급이 안되여 늘 죽는다 한탄하다  자살함. 전남 순천 경찰서에는 엄동설한에도 도항증을 얻으려 젊은이 늙은이 남자 여자 가릴것없이 몰려들어 경찰서가 두통을 앓고 있다고. 일본에 노동으로 가기위해 부산의 부두에는 사람들이 이열종대로 행렬을 이룸. 일본 본토는 경기가 좋고 노동력이 부족하여 취직이 잘된다하여 앞다투어 도항이 증가하여 당국이 큰 두통을 앓고 있음. 경북도 회의에서 도항증명의 철폐를 희망하는 논의를 함. 전북 남원의 주막에서 브로커가 도항을 시켜준다고 오십원을 받고 사기치다  순사에게 검거. 부산 송도 해안에서 오십여명의 밀항자를 검거. 부산 좌천동에 밀항자 100여명을 실은 배를 붙잡았는데 그중 80여명을 체포함. 그렇다.. 반일종족주의

현재 벌어지고 있는 한-일 관계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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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대법원 이 위안부 및 강제징용에대한 배상문제에 대해  한국 국민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신일본제철 의 국내자산을 압류하라고 최종 판결  함. 2. 이에대해 일본이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이미 끝난 사항이므로  판결에 대해 납득할 수 없다 는 뜻을 한국 정부에 전달하지만,  한국 정부는 삼권분립으로 인해 행정이 사법부의 판단에 관여할 수 없다고  대답하면서 대법원의 판결에 따르겠다는 답변을 함. -> 이 부분에서  한일청구권협정 문제 가 불거짐. 3. 한일청구권협정에서는  협정내용과 관련한 논란이 있을 시 한국대표 1인, 일본대표 1인, 한일 양국이 협의한  제 3국 대표 1인을 포함하여 중재위를 구성 하기로 되어있으므로, 일본은 이에 따라 한국 정부에  중재위 구성을 지속적으로 요구함. 4. 한국은 같은 입장을 반복하며 중재위구성을 거부함. ->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개인 의견차가 존재할 수 있으나,  일본과 한국 양국의 청구권협정은 이미 완료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청구권협정 내용을 살펴보면 그렇게 보여질만한 충분한 여지를 가지고 있음. 2005년 노무현대통령 시절 1965한일협정 연구관련 민관위를 구성  (이해찬,  문재인 민정수석 위촉됨) 논의결과 민관위는 1965년 합일 협정에 개인청구권은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현재에 이르러 이를 행사하기 어렵다고 발표. 이유인즉슨, 한일협정당시 일본정부가 3억달러를 지원한 것에 강제징용 내용이 포함되었다는 것으로 해석 되었으며,  명부가 불완전하기 때문. 그 뒤 실제로 노무현정부는 피해자에 6184억원을 지원함. (해당내용  이 해찬, 문재인 서명) 한국이 중재위를 거부하는 이유도 이 이유에서인데, 중재위가 구성되면 거의 필연적으로  제3국 대표는 일본의 손을 들어줄 것이 뻔하기 때문. 일본은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했고,  진정성  여부를 떠나(진정성이라는 것을 판단하는 객관적 잣대가 없기 때문에,  이는 말꼬리잡기, 트집잡기 전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