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교수가 이야기 하는 군 위안부의 진실



반일 종족주의의 저자인 이영훈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일본군 위안부는 일제시대에 합법화되어 있던

공창제를 일본군이 1937년부터 군 시설로 지정한 것이라고 설명한 후 성노예설을 반박했다.

특히 일본 관헌에 의한, 말하자면 일본 군경의 강제연행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언하면서

위안부의 기본 개념은 모집에 의한 매춘으로 종전부터 존재하던 공창이 위안소로 간판을

바꿔달고 군인들을 상대로 영업을 한 것이라고 했는데 그 근거로서 여러가지 자료를 제시했다.



일본군 전쟁포로 심문 보고 제49호

위 자료는 1944년 8월 버마를 접수한 미군이 위안부를 심문한 후 같은해 10월 1일에 작성한 심문 보고서다.
 

위안소의 운영수칙에 대해서 이 보고서는 남기고 있는데, 위안부의 여성들이 병사들과는 다르게 음식과 물품이

통제되어 배급되는 상황이 아니었고, 또 그런 물건들을 가지고 싶다면 얼마든지 구매할 만큼 많은 돈이 있어서

잘 살았다고 전한다. 건강 상태도 매우 좋았다고 한다. 특히 군에서는 병사들이 위안소를 찾을 때 지켜야 하는 규칙을

매우 엄격하게 적용하였기 때문에 일반병들의 불만이 꽤 있을 정도였다고 적고 있다. 




다카모리(高森部隊) 부대의 위안소 업규 규정
 
-위안소 이용 시 연대본부가 발생한 허가증을 영업자에게 제출해야 한다.
-위안소 내에서는 음식을 들 수 없다.
-위안부 및 영업자에 대해 난폭한 행동을 금한다.
-이용시간을 엄수하고 타인에 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
-영업자 기타 위안부 여급 등에 대한 일체의 대차 관계를 엄금한다.
-이용시간과 요금
병은 10시부터 17시까지, 30분에 1원, 1시간에 2원.
하사관은 17시부터 22시까지, 30분에 1월 20전, 1시간에 2월 40전
준사관 이상은 22시부터, 1시간 3원, 24시 이후는 10원.
-사쿠(콘돔)는 영업자가 부담한다.
-황군 의외의 자는 접객을 금한다.
-영업자는 매월 초 5일까지 위안부별 영업 상황을 보고한다.



1944년 10월 27일자 매일신보 1면의 군위안부 모집 광고

일본군은 민간에서 꽤 영향력 있는 주선업자에 위안부 모집을 의뢰했고,

그들의 주선을 통해 위안소를 경영하는 업주가 선발되었다.

이렇게 선발된 업주가 위안부를 모집하였던 것이고

이들은 전차금을 준비해서 여자들을 모집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부모에게 전차금을 주고 딸을 데려가는 형식이라는 것.


박치근의 일기에 기록된 위안소와 포주 명단

조선 여자들을 모집해서 영업을 했던 포주들은 당연하게도 조선인이 거의 대부분이였다.

이들은 위안부를 데리고 장사를 하면서 위안부가 지급받은 화대를 챙겨갔다.

그리고 1943년 후반에 일본군은 위안소 업자에게 빚을 다 갚은 여성들은 귀국할 수 있도록

명령하였고, 계약을 기반으로 군의 엄격한 통제 아래에 놓여 있었으므로 적지 않은 수가 계약이 끝나면 위안소를 떠났다.




일본 시모노세키 우체국에 보관된 문옥주 씨의 군사우편 저금 원장

문옥주 씨의 군사우편 저금 원장을 통해 위안부의 저축액을 알 수 있다.

그녀는 1943년 8월부터 시작해 1945년 9월 29일까지

총 2만6551엔(당시 3만엔은 현재 가치로 엔화로 약 1억 3606만엔, 원화로 약 15억원) 이상을 저금했다.

대구에 있는 어머니와 오빠에게 5000엔을 송금했고, 이외의 개인적으로 용돈을 쓴 것도 있다.

랑군에서 외출을 나가 악어가죽 가방과 고급의 녹색 레인코트, 다이아몬드를 사기도 했다.

여러가지 통계와 자료를 검토해보았을 때 일본군 위안부를 성노예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이영훈 교수의 설명으로 솔직하게 말하면 위안부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온 창녀라는 이야기다.

(애초부터 공창에서 몸을 팔던 창기가 위안부가 되어서 해외진출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비극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동아일보 》 1939년 8월 31일 조간 4면 기사

부산의 악덕 소개업자가 농촌 부녀자를 유괴하여 만주로 끌고가서 팔아 피해 여성이 100명에 달한다고 보도하였다.



《매일신보》 1937년 3월 28일 자 보도

"돈에 눈 어둔 부모"라는 제하의 기사에는 인신매매업자에게 딸을 팔려는 부모와

그 부모에게 반발하여 경찰서에 찾아가 순사들에게 읍소하는 김초향이라는 여성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주선업자들의 꼬임에 넘어가 전차금을 받고 딸을 파는 부모의 이야기는 당시 조선에서 드문 일이 아니었다.

조선 특유의 신분제와 처첩제가 식민지의 호주제와 만나 왜곡된 성 문화와 성 윤리를 낳은 불행한 일들이었다.




매번 증언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걸로 말이 많은 이용수 씨의 초기 증언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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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최초 증언

내 동갑내기 친구 중에 김분순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어머니는 술장사를 하고 있었다. 하루는 내가 그 집에 놀러가니까 그 어머니가 “너 신발 하나 옳게 못 신고 이게 뭐냐, 애야, 너 우리 분순이하고 저기 어디로 가거라. 거기 가면 오만 거 다 있단다. 밥도 많이 먹을 거고, 너희집도 잘 살게 해준단다”라고 했다. 당시 내 옷차림새는 헐벗고 말이 아니었다.

며칠이 지난 후 분순이랑 강가에 가서 고동을 잡고 있었는데, 저쪽 언덕 위에 서 있는 웬 노인과 일본 남자가 보였다. 노인이 손가락으로 우리를 가리키니까 남자가 우리쪽으로 내려왔다. 노인은 곧 가버리고 남자가 우리에게 손짓으로 가자고 했다. 나는 무서워서 분순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반대쪽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어느날 새벽, 분순이가 우리집 봉창을 두드리며 “가만히 나오너라” 하며 소곤거렸다. 나는 발걸음을 죽이고 살금살금 분순이를 따라 나갔다. 어머니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 그냥 분순이를 따라 집을 나섰다. 집에서 입고 있던 검은 통치마에 단추 달린 긴 면적삼을 입고 게다를 끌고 있었다. 가서 보니 강가에서 보았던 일본 남자가 나와 있었다. 그는 마흔이 좀 안 되어 보였다. 국민복에 전투모를 쓰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옷보퉁이 하나를 건네주면서 그 속에 원피스와 가죽구두가 있다고 했다. 보퉁이를 살짝 들쳐 보니 과연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가 보였다. 그걸 받고 어린 마음에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만 다른 생각도 못하고 선뜻 따라나서게 되었다. 나까지 합해 처녀가 모두 다섯 명이었다.


그 길로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경주까지 갔다. 그때 나는 생전 처음으로 기차를 타보았다.
경주에 가서 어느 여관에 들어갔다. 여관 앞 개울가에서 손을 씻고 있는데, 산비탈에 보라색 꽃이 한송이 피어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꽃이어서 무슨 꽃이냐고 물어보니까 도라지꽃이라고 했다. 
거기서 이틀밤인가를 지냈는데 또 여자 두 명을 더 데리고 왔다. 그래서 여자가 모두 일곱 명이 되었다. 
경주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를 지나가게 되었다. 달리는 기차의 깨진 유리 차창 저편에 우리집이 보였다. 
그때서야 비로소 집생각이 나고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난 우리 엄마에게 가야 한다고 하면서 막 울었다. 
옷보퉁이를 밀치며 이거 안 가질테니 집에 보내 달라고 하며 계속 울었다. 울다가 지쳐서 곯아떨어졌는데 얼마나 갔는지 모르겠다. 

여러 날을 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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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분순이 엄마의 꾀임에 넘어가서, 예쁜 옷에 혹해서 위안부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제 왜 아베 총리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두고 "인신매매 피해자" 라고 지칭하는지 알겠지?

주선업자의 꾐에 빠지거나 가난 때문에 부모가 포주에게 팔아서 위안부가 된 일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향해서 "인신매매 피해자"라고 지칭하면서 마음이 아프다고 한 것이다.

결국 조선 여자를 등처먹고 팔아먹고 착취한 것은 같은 조선인이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기생, 양공주, 다방레지, 업소녀, 원정녀, 오피녀 등을 향해 성노예라고 하지 않는다.







이영훈 교수는 이렇게 한국인이 외면하고 있는 역사의 진실, 눈가리고 아웅하는

한국 사회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폭로하였고 그래서 공격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향해서 공개 토론을 해보자고, 들어오라고 했더니 또 잠적해버리고 있다.

그래도 이영훈 교수를 필두로 한 양심적인 지식인 덕분에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위안부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아예 금기시되던 문제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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